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478회]

‘삼가 공경스럽게 저의 몸(躬)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할지니, 다만 죽은 후에나 그칠 따름입니다’

현대판 명재상으로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는 주은래(周恩來) 총리가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鞠躬盡瘁(국궁진췌) 死而後已(사이후이)”

이 여덟글자는, 잘 아시는바와 같이 제갈량(諸葛亮)의 <後出師表(후출사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절이며, 위작(僞作) 논의가 분분한 이 글 가운데 가장 제갈량(諸葛亮)다운 글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명구(名句)이다.

주은래(周恩來 1898 - 1976)
주은래(周恩來 1898 - 1976)

이 글의 뜻을 먼저 살펴보자. 
먼저 “鞠躬(국궁)”이란 단어는 ‘몸을 굽혀 예(禮)를 표함(彎身以示曲禮)’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문헌은 <論語 (논어) 鄉黨(향당)> 편으로, ‘공자(孔子)께서 대궐의 정문을 들어가실 때에는 허리를 굽혀 삼가고 두려워함이, 마치 들어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듯이 하셨다. ’라고 공자(孔子)의 평소 몸가짐을 기술하고 있다.

“鞠(국)”이란 글자가 ‘활 처럼 굽힘(彎曲)’ 이란 훈(訓)으로 처음 사용되는 사례인데, 여기서는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리는 표(表) 이므로, ‘몸을 굽혀 삼가고 근신한다’는 뜻으로 이 <論語(논어)>구절을 용전(用典)한 것이다.

“瘁(췌)”는 ‘수고로움’을 뜻하고, “已(이)”는 ‘멈추다’의 뜻이므로, “鞠躬盡瘁(국궁진췌) 死而後已(사이후이)”는 ‘삼가 공경스럽게 저의 몸(躬)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 할지니, 다만 죽은 후에나 그칠 따름입니다’란 뜻이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신명(身命)을 다하겠다’ 는 뜻을 후주(後主) 앞에서 공경스럽게, 그러면서도 비장하게 표현한 명구(名句)여서, 고대로 부터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후출사표는 위작(僞作) 논의가 매우 분분하다. 그 첫번째 이유는, 이 글의 출처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정사(正史) <삼국지> 권35, <제갈량전>을 보면, AD 227년 그는 예의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北伐)을 감행하여 위(魏)나라 기산(祁山)을 공격한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이어, 남안(南安), 천수(天水), 영안(永安)이 함락되자 '위(魏)'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위' 명제(明帝)가 직접 장안(長安)으로 와서 장합(張郃)장군에게 맞서 싸울 것을 명 한다.

이때 제갈량은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 경험이 부족한 마속(馬謖)을 선봉으로 삼아 싸우게 했는데, 마속이 자신의 전략배치를 따르지 않아 대패(大敗)하자, 어쩔수 없이 철군하게 된다. 

이때 자기 손으로 자신이 아끼던 마속을 참(斬)하고 (사자성어인 ‘읍참마속(泣斬馬謖)’이 여기서 유래함), 후주(後主)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잘못을 밝힌 후, 스스로 자신의 관직을 3계급 강등해 줄 것(‘請自貶三等’)을 청한다.

그렇지 않아도 북벌(北伐)에 대한 반대가 있던 터에, 크게 패배하고 돌아오니 반대여론이 들끓었을 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이다.

<한진춘추>를 지은 습착치(習鑿齒)란 인물도 이 글의 진위(眞僞)가 자신이 없었던지 "이 <후출사표>는 <제걀량 전집> 에서는 실려 있지 않으며, 다만 나는 장엄의 <묵기>란 책에서 인용한다" 라고 위의 인용구에서 기록하고 있다.

장엄(張儼)은 삼국시대 오(吳)나라 사람으로, 매우 재능이 있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박학다식 (博學多識)’했던 인물이지, 정확한 기술을 요하는 사학가(史學家)는 아니었으며, 그런 점에서 <默記(묵기)>란 책도,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역사책과는 거리가 있는 책일 것으로 보고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중국은 가짜가 많기로 유명한 나라다. 중국은 이후 청(淸)나라로 들어서면서 과거 전해오는 글들에 대한 진위여부를 고증하는 고증학(考證學)이 크게 유행하는데, 근거가 빈약 한 이글이 그 비판을 피해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작(何焯), 전대소(錢大昭)등의 학자들이 본격적 인 검증작업에 들어가는데, <후출사표>의 내용중 “...然喪趙雲”이라 하여, 우리가 조자룡(趙子龍) 으로 익히 알고있는 조운(趙雲)이 <후출사표>를 쓰는 AD228년 이미 사망하였다고 기술하고있다.

역사적으로는 조자룡이 <후출사표> 일년후인 AD 229년 사망하였다는 사실과 ‘조조가 이복(李服)을 임용하였으나, 이복이 배반하였고...’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위지(魏志) 어디에도 그러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조조가 창패(昌霸)를 다섯 번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정사 <삼국지>에는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등 역사적 면에서 맞지 않는 부분이 다수 있음을 발견해 내었다.

하지만 이들 고증학자가 가장 중요하게 지적한 점은 문장의 분위기가 <전출사표>와 <후출사표>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이미 소개한 바와같이 <전출사표>는 출정(出征)에 따른 비장한 심정, 살아서 다시 못보는 경우를 생각한 듯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마치 스승의 입장에서 타이르듯 후사를 당부한 후, ‘북벌(北伐)의 결과는 모두 자신이 책임지겠다’라고 하는, 우리가 익히 아는 제갈량(諸葛亮)이란 인물의 풍격(風格)이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다.

이처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그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 마속의 패배에 대해 스스로 자신의 3계급 강등을 청하는 상소(上訴)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반면에 <후출사표>의 내용은, 북벌(北伐) 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자신이 북벌을 계속하여야 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6가지를 들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패배에 대한 변명이 군데군데 들어가 있어, 제갈량의 풍격 (風格)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데, “선제께서는 매번 조조가 유능하다고 칭 하셨지만 오히려 이런 패배도 겪었습니다. 하물며 신(臣)은 노둔한데 어찌 전쟁마다 반드시 이길 수 있겠습니까?”란 대목이나, 제일 마지막 대목인 “신은 다만 있는 노력을 다 할 뿐, 전쟁에서의 성패는 신의 능력으로 예견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 다”라는 대목 등은 제갈량답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고 생각합니다. 글이란 곧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라, 반드시 그 사람의 풍격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한문(漢文)의 세련됨을 떠나서, 그 글이 풍기는 기운이 너무 달라서, 도저히 이 두 글이 한사람에 의해 쓰여 졌다는 것을 받아 들이기가 힘듭니다.

<전출사표>는, 소동파가 평(評)하듯, 죽음을 각오하고 출정(出征)하는 사람이, 솟구치는 울음을 억누르며 말하는 간결함과 곧음이 있는 반면, <후출사표>는 매우 장황합니다.

혹자는 이 글이 제갈량(諸葛亮)의 손자인 제갈략(諸葛恪)이 위조했을 가능성 등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제갈략이 오(吳)나라 에서 벼슬을 할 때 이 표(表)가 '오'로 흘러들어 갔고, 그것이 장엄(張儼)이란 사람에 의해 <默記(묵기)>란 책에서 소개되었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 어느 누구도 진실을 분명하게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학자들의 대체적인 관점은 <후출사표>는 여러 가지로 역사적 모순점이 있어서 위작(僞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며, 필자 또한 글의 풍격(風格)으로 보아 제갈량의 글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출사표>를 소개드릴 때, <후출사표>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글의 진위여부를 떠나, “鞠躬盡瘁 (국궁진췌) 死而後已(사이후이)”란 글귀가 많은 사람에 의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수능시험이 끝난 오늘도 주위의 지인에게 '국궁진췌 사이후이' 하시는 지혜로운 하루를 맞이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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