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475회]

얼굴 가죽을 벗기다. 파렴치한 사람의 본색을 드러내게 해 망신을 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오왕(吳王) 손호(孫皓)의 포악한 정치로 인해 진(晉)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손호는 난폭하고 잔인했다. 

손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 간언하는 신하들을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기도 하고, 뜻을 거역하는 궁녀의 목을 베어서 흐르는 물에 던져 버리는 등 포악한 행위를 일삼았다.

손호 - 사진출처 : 삼국지사전 | 선뿨쥔 | 현암사
손호 - 사진출처 : 삼국지사전 | 선뿨쥔 | 현암사

오나라가 진나라에 항복한 뒤, 가충(賈充)이 낙양에 끌려온 손호에게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긴 까닭을 묻자, 손호는 두꺼운 얼굴 가죽이 미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는 배씨어림(裴氏語林)에 나온다. 삼국 지(三國志) · 오서(吳書) 손호전(孫晧傳)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벗겨 내기도 하고, 눈을 파내기도 했다고 기록하여 손호의 잔혹함을 묘사했다.

이처럼 ‘박면피’는 원래는 얼굴 가죽을 벗기는 잔혹한 고문이나 형벌을 가리켰는데, 후에는 파렴치하고 뻔뻔한 사람의 본색을 드러내게 해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른바 낯가죽이 두껍다라든가 뻔뻔스럽다라든가 염치를 모른다는 것을 후안무치라고 하는데 이것은 시경 소아의 교언의 한편에 교언여황(巧言如簧) 안지후의(顔之厚矣)에서 나온 고어이다. 

이것을 좀 새롭게 구성한 것이 남사(南史) 변변 전에 나오는 면피후(面皮厚) 즉 뻔뻔스러운 사람을 두고 얼굴 가죽이 두껍다고 말했다.

손호의 포악한 정치로 인해 진(晉)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루어 냈다고 할 정도로 손호는 난폭하고 잔인했다. 오나라를 정복한 왕준은 손호를 낙양으로 데려와 사마염을 뵙게 했다. 

손호는 대전에 올라 머리를 조아리며 진황제 사마염를 뵈었다. 진제 사마염이 앉을 자리를 내어 주며 말했다. “짐이 이 자리를 마련하고 경을 기다린지 오래다!” 손호가 대답했다. “신 또한 이런 자리를 남방에 마련해 놓고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진제가 껄껄 웃었다. 

가충이 손호에게 “어째서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알을 도리는 짓을 했는가?”라고 물었다. 손호가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려는 자와 간사 하고 불충스런 자에게만 이런 벌을 내렸습니다!”고 말했다. 

이에 가충은 말을 못하고 심히 부끄러워 했다. 진에 투항하면서 보여준 이런 낯짝 두꺼운 행동 으로 손호는 면피후(面皮侯)라는 호칭을 얻었다.

손호(孫皓 242년~284년, 재위 264년~ 280년)는 오나라 최후의 황제로 자는 원종(元宗)이다. 별칭으로 팽조(彭祖)가 있다. 손권(孫權)의 셋째 아들인 손화(孫和)의 서장자다.

손화가 승상 손준의 명령으로 자결한 후 적모 장씨도 손화를 따라 죽었으므로 생모인 하씨에게 양육 받았다. 경제 손휴(景帝 孫休)가 황제에 즉위하자 형제들과 함께 작위를 받아 자신은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264년 7월 경제가 급서하고 태자 손완(孫)을 후계로 지목했다. 그러나 마침 '촉'이 멸망하고 교지를 위나라에 빼앗겼으므로 국내에는 능력 있는 임금을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좌전군 만욱(萬彧)은 오정령을 지내면서 오정후와 친분을 쌓았다. 만욱은 승상 복양흥(濮陽興)에게 어린 태자 대신 연장자이며 총명한 손호를 세울 것을 건의했다. 복양흥과 장포(張布)도 동의하여 마침내 손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손호는 즉위하자 연호를 바꿔 원흥으로 일컬었다. 264년 원년 8월 상대장군 시적과 대장군 정봉을 좌우 대사마로 삼았다. 자신을 즉위하게 한 좌장군 장포와 승상 복양흥에게도 은상을 주었다. 

장포는 표기장군으로 삼았고 복양흥은 시중을 더하고 청주목을 겸하게 했다. 즉위 초에 손호는 선정을 베풀며 창고를 열어 가난한 자를 진휼했다. 궁녀를 내보내 아내 없는 사람들과 짝지어 주었고 황실 후원을 개방해 훌륭한 황제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10월이후 얼마못가 광폭하고 교만해졌다. 만욱이 장포와 복양흥이 손호를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고 참언을 하자 11월에 둘을 주살하고 삼족을 멸한다.

즉위 직후 이미 전 황제 일족의 권위를 깎아 경제의 황후인 주태후를 황후로 격하시키고, 반면 자신의 아버지와 생모 하씨를 추존하여 각각 황제와 황후로 삼았다. 그래도 이때에는 경제의 태자인 손완을 예장왕으로, 손굉을 여남왕으로, 손망을 양왕으로, 손보를 진왕으로 삼았다. 

이때에 부인 등씨를 황후로 삼아 경제를 정릉에 장사지내고, 황후의 아버지 등목을 고밀후에 봉했으며, 외숙 하홍 등 셋은 열후로 봉했다.

손호는 265년 감로 원년 7월 주황후를 핍박하여 죽였다. 뿐만 아니라 정전에서 장사 지내지 못하게 하고 병들어 죽은 것처럼 꾸몄고 경제의 네 아들을 오의 작은 성에 몰아넣고 나이가 많은 순으로 둘을 죽였다. 

한편 아버지의 적장자 정부인 장씨의 아들 손준도 죽였다. 264년 원흥 원년 위나라에서는 경제 말년에 '오'에서 빼앗은 교지에 태수를 임명했다. 또 사마소가 상국이 되어 옛 오나라의 항장 서소와 손욱을 오나라에 보내 손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265년 감로 원년 4월 손호는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원흥에서 감로로 바꾸고 9월에는 서릉독 보천의 안을 받아들여 건업(建業)에서 무창(武昌)으로 천도를 했다. 건업은 제갈정과 정고에게 지키게 했다.

11월에 무창에 도착하여 대사면을 행한다. 당시 망기(望氣)하는 사람이 “형주에 왕기가 있어 양주를 깨트리니 건업궁이 불리하다.” 라고 하여 수도를 무창으로 옮겼다.

그러나 무창으로 천도한 후 양주의 백성들은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무창에 물자를 공급해야 했으므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육개의 상소에 따르면 “차라리 건업의 물을 마시지 무창의 물고기를 먹지는 않을래요. 차라리 건업으로 돌아가 죽지, 무창에 살지는 않을래요.” 라는 동요가 퍼질 정도였다.

손호는 육개의 상소를 받아 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 266년 보정 원년 12월 건업으로 다시 천도했다. 266년 보정 원년 정월, 전년에 죽은 옛 위나라의 상국이자 당시 진나라의 추존황제인 사마소의 조문을 위해 대홍려 장엄, 오관중랑장 정충을 파견했다. 

귀로에 장엄은 병사했고, 정충은 익양을 습격하여 취할 만하다고 권했다. 진서대장군 육개는 파촉이 방금 병합되었고 이미 친교를 꾀하면서 싸우자고 할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 거기장군 유찬은 이득이 있을때 취해야 한다며 찬성했다. 손호는 내심 유찬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육개의 말대로 '촉'이 막 평정된 터라 결국은 실행하지 못했다. 

교주에서 일어난 곽마(郭馬)의 반란과 손호의 주변에 있던 암신들에 의해 국력이 쇠퇴해진 때에 '위'를 대신해 일어난 진나라의 대공세로 진나라에 항복했다. 항복 후 사마염(司馬炎)에 의해 귀명후(歸命侯)에 봉해졌고 284년에 진나라의 수도 낙양(洛陽)에서 사망했다.

만욱(萬彧~272년)은 오나라의 대신이다. 본래는 노예 출신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오정현령 벼슬을 할 때 오정후(烏亭侯)였던 손호(孫皓)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264년 손휴(孫休)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좌전군 (左典軍)이었던 만욱은 장포(張布)와 복양흥(濮陽興)에게 손호의 인품을 칭찬하며 새 황제로 추대할 것을 권했다. 두사람은 만욱의 말을 받아들여 태후 주씨에게 아뢰고 손호를 새 황제로 등극하게 했다.

그러나 손호가 포악한 짓을 일삼고 주색을 좋아하자 크게 실망하여 후회하는 생각을 가졌고 만욱은 이 사실을 손호에게 고했다. 격노한 손호는 장포(張布)와 복양흥을 귀양 보냈다가 다시 사람을 보내 죽이고 그들의 삼족을 멸했다.

만욱은 266년 8월 우승상으로 임명되며 267년 손호가 수도를 건업(建業)으로 옮기자 무창에 남아 지켰다. 268년 10월에 군사를 이끌고 양양 (襄陽)을 공격하였고 272년 만욱은 자살한다. 

271년 손호가 건업의 서쪽으로 오랫동안 유람을 나가있자 만욱은 정봉(丁奉), 좌장군 유평(留平)과 손호가 건업으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자신들끼리 건업으로 돌아가 정무를 처리 할 것을 의논했다. 이를 노엽게 여긴 손호는 잔치 때 만욱에게 독주를 건네주게 했다. 

그런데 술잔을 전하는 사람이 술을 덜어내는 통에 무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호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만욱은 앞으로 닥칠 화를 두려워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만욱의 자식들은 손호에 의해 여릉(廬陵)으로 귀양 보내졌다.

손호와 만욱의 인연은 초기에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상생 하였지만 말년에는 상극이 되었다. 만욱은 손호에게 박면피는 당하지 않았지만 독주를 받았고, 겨우 살아났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식들은 귀양을 갔다.

사례
저런 인면수심을 가진 범죄자는 '박면피'를 해서 천하에 공개 해야한다.

오늘도 주위에 박면피 해야 할 사람은 많이 있으나 이 또한 나를 되돌아보는 선생으로 생각하는 슬기로운 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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