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468회]  

가까운 벗이나 반가운 손님이 찾아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신 마저 거꾸로 신고 나가 마중한다는 뜻으로,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한(東漢) 헌제(獻帝) 때, 조정에는 좌중랑장(左中郞將)을 지내는 채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학식이 있는 풍부한 사람으로 황제에게 중용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집안에는 늘 손님들이 많았으며, 대문 앞에는 오고가는 수레들로 붐볐다. 

한번은, 대문 앞에 왕찬(王粲)이라는 손님이 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채옹은 왕찬이라는 이름을 듣자, 즉시 집안에 있던 손님들을 물리치고 달려 나가 그를 맞아들였는데, 어찌나 급히 달려나갔 던지 신발을 거꾸로 신었다.[聞粲在門, 倒履迎之]

잠시후, 채옹은 왕찬을 객청(客廳)으로 안내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대단한 손님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알고보니 왕찬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고관대작인 채옹이 이런 아이를 보고 이처럼 황망하게 영접하다니 설마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채옹은 사람들의 놀라는 모습을 보더니 곧 해명 하였다. ˝이 분은 왕찬이라는 사람인데, 저는 그보다 못합니다! 저희 집의 모든 책과 글은 마땅히 그에게 드려야 합니다!˝ 채옹은 이어서 왕찬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루는 왕찬은 친구들과 함께 길을가다가 비석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비석 위에는 많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답니다!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그 글자들을 외울 수 있겠느냐고 묻자, 왕찬은 눈으로 비석을 한 번 훑어보더니 이내 한 글자도 틀리지도 않고 다 외우더랍니다!˝ 

이 성어는 삼국지(三國志), 제21권 위서(魏書)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傅傳) ‘王粲(왕찬)’ 편에서 유래한다. 왕찬(王粲)은 17세에 사도(司徒) 왕윤(王允) 으로 부터 초빙되어 조서를 받아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임명되었지만, 당시 장안이 혼란스러웠으므로 취임하지 않고, 형주(荊州)로 가서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

유표(劉表)는 왕찬(王粲)의 용모가 추하고 신체가 허약하지만 대범한 성격이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용하지 않았다. 유표(劉表)가 죽은 후 왕찬(王粲)은 유표의 아들 유종(劉綜)에게 조조 (曹操:155년 - 220년)에게 항복 할 것을 권했다.

유종이 왕찬과 다른 신하들의 의견대로 조조에게 항복하게 되자 왕찬 역시 조조에게 초빙 받아 그를 섬기게 되어 승상연(承相椽) 으로 임명되었으며,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 받았다.

후에 왕찬(王粲)은 군모제주(軍謀祭酒)로 승진 했으며 위(魏)나라가 건립되고 나서는 시중(侍中) 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조조가 옛 제도를 참고 하여 의례(義禮) 제도를 제정할 때에는, 반드시 왕찬에게 담당시켰다. 

그 후 건안(建安) 21년, 조조를 따라 오(吳)나라를 정벌했으며, 이듬해인 건안 22년 봄, 41세로 병사했다. 왕찬은 기억력이 좋았을 뿐만아니라 글도 매우 잘 썼다. 왕찬의 증조부인 왕공(王龚)과 조부 였던 왕창(王暢)은 모두 삼공을 지냈고, 부친인 왕겸(王謙)은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의 장사(長史)였다.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은 왕겸(王謙)의 집안이 유명한 삼공의 집안이었으므로 인척관계를 맺으려고 자신의 두 딸을 보여 둘 중 한 명과 혼인하도록 보냈지만 왕겸(王謙)은 이를 거절 한 이유로 면직되어 머지않아 후에 질병으로 죽었다.

왕찬(王粲)은 재능이 뛰어나 바둑을 두던 바둑 판을 흩뜨려도 금방 원상태로 복기 할 수 있었다. 헌제(獻帝)가 동탁(董卓) 때문에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을 때 왕찬 또한 장안으로 이주하였다. 

왕찬은 좌중랑장(左中郎將) 채옹(蔡邕)의 눈에 들었는데 그를 만나보고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서 41세에 세상을 떠나 60여 편의 시가(詩歌) 를 남겼다.

건안칠자(建安七子)는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의 건안 연간(196년 - 220년) 에 위무제(魏武帝) 조조(曹操),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 조식(曹植) 등 조씨(趙氏) 삼부자 밑에서 활약한 문학 집단 가운데 특히 뛰어난 재자(才子) 7인을 가리킨다.

‘업하(鄴下)의 칠자’라고도 하는데, 이와같다.
*노국(魯國)의 공융(孔融 : 153년 - 208년), 
*진류(陳留)의 완우(阮瑀 : ? - 212년), 
*북해(北海)의 서간(徐幹 : 170년 - 217년), 
*광릉(廣陵)의 진림(陳琳 : ? - 217년), 
*여남(汝南)의 응창(應瑒 : ? - 217년), 
*산양(山陽)의 왕찬(王粲 : 177년 - 217년), 
*동평(東平)의 유정(劉楨 : ? - 217년) 7인이다.

※ 참고 : 三國志(삼국지), 第21卷 魏書(위서) 王衛二劉傅傳(왕위이유부전) ‘王粲(왕찬)’ 

오늘은 좋은 지인에게 '도리상영' 할 인물이 되어 찾아갈 수 있는 행복한 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사진출처 : 삼국지사전 | 선뿨쥔 | 현암사
사진출처 : 삼국지사전 | 선뿨쥔 |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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